정보화마을 나주 배꽃마을

  • HOME
  • 마이인빌
  • 메일
  • 고객센터
  • 사이트맵
  • 마을안내 마을체험 마을장터 마을여행 마을공간 마을공간
    임난첩보서목

    임난첩보서목

    임진왜란 때 전라도 흥양(현재의 고흥)현감으로 있던 최희량(1560~1651)이 선조 31년(1598) 3월 20일부터 그해 7월 12일까지 왜적과 싸워 생포 또는 목베인 전과를 적어 당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관찰사 등에게 보고한 문서들을 한데 모은 절첩(折帖)이다. 원래는 따로 흩어져 있던 것을 3·1 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었던 공의 후손 최기정이 서목의 뒤에 19절지로 배접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이 첩책의 표지에는 최기정이 쓴 「최일옹이 왜구를 물리친 보고서 원본(崔逸翁破倭報捷元本)」이라는 글씨가 해서로 묵서되어 있고, 각 서목에는 홍색종이 또는 백색종이를 오려서 쓴 「첨산(尖山)승첩」「양강승첩」「고도승첩」또는「전라도관찰사지인」「봉사지인」등의 표시가 붙어 있어 분류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희량은 자를 경명, 호를 일옹,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나주(현 다시면 가흥리)에서 태어나 1586년 별시과와 알성과에 장원, 1594년 무과 급제후 빙부인 충청수군 이계정(李繼鄭)을 도와 왜적방어에 힘썼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흥양현감에 제수(除授) 되었다. 이순신 휘하로 명량·첨산·예교 등에서 전승을 거두었고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1605년 선무원종 일등공신으로 훈록되었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270
    • 지정번호 : 보물 제660호
    • 소유자 : 최윤화 (현재 국립 진주박물관에 보관 중)
    • 규모 : 가로 26cm, 세로 37cm, 10매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년월일 : 1979년 8월 10일
    복암리 고분군

    복암리 고분군

    복암리 서쪽의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4기의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이다. 이 일대는 영산강의 지류를 낀 구릉지대로서 원래 3기 정도가 더 있었으나 30여년전 경지정리시 삭평되었다. 1·2호분은 1995년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를 통해 정확한 형태와 규모가 파악된 후 복원되었으며 3호분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3호분에서는 22기의 옹관(甕棺)과 1기의 석곽옹관(石槨甕棺), 1기의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 3기의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11기의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2기의 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 1기의 목관(木棺) 등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묘제가 망라된 41기(분구조영 이후의 무덤수는 28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금동신발과 은제관식(銀製冠飾), 큰칼(은장삼엽환두대도, 규두대도)·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호분에서 이와같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것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복암리 3호분은 전용옹관 중에서 이른시기(3세기대)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횡혈식석실분 중에는 7세기 전반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어 전체적으로 400여년간 사용된 고분으로 중심조영 연대는 5세기 후반 ∼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당시 토착 마한(馬韓) 세력에 의해 조성된 집단묘인데 특히 1996년에 조사된 한 석실(石室)에서는 4기의 옹관이 출토됨으로써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치는 영산강유역 초기석실분의 피장자는 옹관을 썼던 기존의 세력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영산강유역의 고대문화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영산강유역의 초기석실분과는 전혀 다른 백제(百濟) 계통의 후기석실분이 들어오고 은제관식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엽경까지는 기존의 마한 집단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인근의 회진리에 위치한 회진성(會津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7호)은 바로 이 복암리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에 의해 사용되었던 성곽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복암리 고분은 다양한 묘제가 복합된 국내 유일의 고분으로 영산강유역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다장(多葬)과 대형분구의 성토방법 과정 연구, 각묘제간의 관계, 옹관묘와 석실분 자체의 변천과정 연구의 표본적 자료 제공, 매장방법 및 부장(副葬) 유물연구의 기준제공, 일본관의 관계,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과 백제와의 관계 연구의 결정적 자료 제공등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이 지역의 고대사를 규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고분이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873-17 외
    • 지정번호 : 사적 제404호
    • 소유자 : 국유
    • 규모
      • 1호분 - 지름:18.5m/높이:4.5m/원형
      • 2호분 - 길이:36m/너비:6~21m/높이 5m/사다리꼴
      • 3호분 - 길이:43m/너비:36m/높이:6m/방대형
      • 4호분 - 길이:35m/너비:17m/높이:2.5m/사다리꼴
    • 시대 : 삼국시대
    • 지정년월일 : 1998년 1월 5일
    최희량장군 신도비

    최희량장군 신도비

    이 비는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큰공을 세운 최희량 장군의 묘역 근처에 세워진 신도비이다. 비 제목은 해서로 "증병조판서무숙공수성최일옹신도비"라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성균관제주세자시강원찬선덕은 송치규"인데, 여기에 후일 송치규의 현손인 송지헌이 기록한 "추기"가 첨가되어 있다. 그 "추기"에 기록된 광무 5년(1901) 8월이 곧 이 신도비의 건립 연대이다. 그리고 건립자는 최희량 장군의 8세손 참봉 귀한, 9세손 기춘, 기정, 10손 우현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 형태는 자연석의 대석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최희량 장군은 명종 15년(1560) 나주에서 참봉 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경명, 호는 일옹 또는 와룡, 본관은 수원이다. 선조 27년(1594) 그의 나이 35세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빙부인 충청도 수군절도사의 추천으로 선전관이 되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흥양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노량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다 효종 2년(1651) 생애를 마치었다. 선조 37년(1604) 선무원종공신1등에 책록,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영조 50년(1774) 병조판서 에 추증되고, 순조 11년(1811)에 무숙의 시호를 받았다. 그가 남긴 『파왜보첩』은 임란사의 중요한 사료로 보물(660호)로 지정되었으며, 유저로는 『일옹문집』이 전하고 있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 369
    • 지정번호 : 도지정 기념물 제53호
    • 소유자 : 사유
    • 규모 : 총높이 280cm, 비신 높이 245cm, 비 너비 118cm
    • 시대 : 1901년
    • 지정년월일 : 1981년 10월 20일
    무열사

    무열사

    무열사는 1797년(정조 21) 건립하여 달성배씨 현조를 배향한 사당으로 나주 유림의 발의와 각 향교의 협찬으로 배현경을 주벽으로 배정지·배극렴을 배향하면서 무열사로 건립했다.1868년(고종 5) 헐린 뒤 유허비(遺墟碑)를 세웠고, 1882년(고종 19) 복건하여 배운룡·배공서·배공보·배승무·배세조 등 5위를 추배하였다. 1983년 강당을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신실인 사우를 비롯하여 내삼문, 강당, 외삼문, 무열사유허비와 무열사중건사적비가 있다. 배현경은 고려 개국 공신으로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배운룡은 배현경의 현손으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달성군(達城君)으로 봉해졌다. 달성군의 8세손인 배정지(廷芝, 1259~1322)는 밀직부사를 지냈다. 배극렴(克謙, 1335~1410)은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1378년 삼도 원수로 재임시 진주·경산 등지에서 왜구를 대파하였고 조선 개국공신(1등)으로 영의정을 지냈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693
    • 지정번호 : 도지정 기념물 제57호
    • 소유자 : 사유
    • 규모 : 사우 일원
    회진토성

    회진토성

    회진리는 백제시대에 豆縣이 설치되었고, 신라 경덕왕때 회진현으로 개명한 이래 그 이름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삼면이 산줄기로 둘러쌓여 있고, 남쪽만이 영산강본류를 향해 개방되어 있어, 영산강 수로 변의 천혜의 요충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백제 이전부터 이미 성곽시설이 있었던 것을 백제가 두힐현의 縣治로 편제하면서 다시 토성으로 축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남아 있는 회진토성은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회진마을의 서·북·동 3면은 나즈막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남쪽만이 영산강 본류를 향해 개방되어 있는데, 회진토성은 개방된 남쪽 방면을 방어하기 위해서 동서의 산록을 연결하여 축조한 일종의 包谷式 토성이라 할 수 있다. 회진토성은 흙을 판축하여 쌓은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 성벽의 기저부 넓이는 6m 정도, 높이는 약 4.6m 정도에 달한다. 이 외에도 영산강 본류와 접해 있는 동쪽 산의 반대 사면에서 계단식 토성인 듯한 흔적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이것이 확인된다면 백제 이전의 토성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산8-101
    • 지정번호 : 기념물 제 87호
    • 소유자 : 국유 및 사유
    • 규모 : 성터일원 약 2.4km
    • 시대 : 삼국시대
    • 지정년월일 : 1986년 2월 7일
    영모정

    영모정

    구진포에서 영산강변 도로를 따라가면 회진마을 좌측 언덕에 영모정이 위치한다. 영모정은 중종 15년(1520) 귀래정 임붕이 건립한 정자로 초기에는 붕의 호를 따 「귀래정」이라 불렀으나 명종 10년(1555) 후손이 재건하면서 「영모정」이라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에 다시 중건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한 무고주 5량가이다. 세부양식은 두벌대의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기단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최근에 다시 그 위에 2m가량의 원형 장대석 주춧돌을 세웠다. 그 위에는 아랫부분을 잘라버린 원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에는 보와 장혀, 도리를 결구하였다. 굵은 보를 걸치고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걸치고 판대공과 파련대공을 섞어 대공을 놓고 종도리를 설치하였다. 평면은 온돌방 1칸, 루마루 2칸으로 실이 있는 정자건물이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90
    • 지정번호 : 도지정 기념물 제112호
    • 소유자 : 사유
    • 규모 : 정면3칸, 측면2칸, 팔작지붕
    보산정사

    보산정사

    보산사(寶山祠)는 조선 중종때부터 선조대 사이에 이 마을에서 태어난 8인의 문관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또한 보산정사(寶山精舍)는 8인의 문관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진을 양성한 곳으로 보산사 사당보다 크고 오래된 누각 건물로 강당형식을 하고 있어 그 예가 희귀하다. 3칸의 맞배지붕 외삼문을 지나면 좌우에 동·서 재실이 있고 그 앞 중앙에 보산정사가 있으며, 중심축에서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곳에 언덕을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이어 맞배지붕의 내삼문이 있으며 그 앞에 사당이 있다. 보산정사는 2단의 다듬돌 바른층 쌓기의 기단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장주형 원형 주춧돌을 세우고 원형기둥을 놓았다. 기둥 위에는 보와 장혀, 도리로 결구되어 있으며 그 밑을 보아지로 받치고 있다. 커다란 보위에는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놓았으며, 그 위에 판대공을 얹고 종도리를 설치하였다.

    장주형 주춧돌에는 하인방을 걸치고 그 위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누마루의 높이는 1m가량 되며 머름의 높이도 다소 높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무고주 5량가이다. 보산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전퇴, 맞배지붕을 하는 1고주 5량가이다. 겹처마에 바람막이판이 있고 무익공식의 최근에 지은 건물로 사당형식을 갖추었으며 8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편 보산사 사당이 있는 곳이 고분이라는 것이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 662-1
    • 지정번호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31호
    • 소유자 : 사유
    • 규모 : 정면 1칸, 측면 2칸, 팔작지붕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년월일 : 1986년 9월 29일
    장춘정

    장춘정

    1561년(명종 16)에 고흥류씨 유충정(柳忠貞 1509∼1574)이 건립하였다.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고봉 기대승(1527∼1574)이 지은 장춘정기(藏春亭記)를 통해서 확인된다. 장춘정이란 정자 이름은 겨울에도 시들지 않은 숲과 사시장절(四時長節) 피는 꽃들이 항상 봄을 간직한 듯 하다 하여 장춘(藏春)이라 하였다 한다. 관찬지리서인 <여지도서>(1757년) 나주 누정조에 11개소의 정자가 나오는데 벽오헌(碧梧軒), 금성관(錦城館) 등 8개소는 관아 건물이고, 3개소가 민간 정자인데, 장춘정(주의 서쪽 10리에 있음)이 영모정(永慕亭), 영팔정(영八亭)과 함께 기록되고 있어 나주의 대표적 정자로 일찍부터 알려 졌음을 알 수 있다. 1872년경 편찬된 관찬읍지인 <호남읍지> 가운데 <나주목읍지> 누정조에는 관아건물을 제하면 7개(장춘정, 영모정, 영팔정, 納래亭, 息蔭堂, 志於齋, 慕孝齋) 누정이 있는데 장춘정이 맨 앞에 기록되고 있으며, 1864년에 간행한 사찬 지리서인 <대동지지>(김정호) 나주 누정조에는 관아건물 2개소(망화루, 빙허루)와 민간 정자 1개소(장춘정)(竹浦 서쪽)만 기록되고 있어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죽산리 화동마을
    • 지정번호 : 도지정 기념물 제201호
    • 소유자 : 사유
    • 규모 : 일원
    동곡리고분군

    동곡리고분군

    다시 동곡리와 영동리는 문평천의 서쪽에 잘발달 된 10~30m 정도의 구릉지대이다. 이곳은 영산강변의 충적지로 이어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분은 대곡마을과 횡산마을의 돌출된 구릉지대에 3기가 있다. 대곡1호분은 이주헌씨 집 뒤쪽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산63-10) 평면방형의 분구와 주구로 구성되어있다. 주구는 북서쪽 모서리에서 윤곽이 확인된다. 축방향은 남-북이다. 규모는 동서32m남북32m 높이 4m정도이다. 분정에는 동서14m 남북12m정도의 평탄부가 형성되어 있다. 주구는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너비6m, 깊이0.5m 정도이다.대곡2호분은 대곡마을에서 남동쪽으로 흘러내린 28m정도의 독립 구릉 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분구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다. 직경30m 높이4m이며, 분정에는 직경12m 정도의 평탄부가 형성되어 있다. 분구 북서쪽에서 확인되는 주구의 흔적은 너비 6m 깊이0.5m 정도이다. 분정과 서쪽 사면에는 도굴갱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있다. 고분 매장 시설은 석실로 추정되고 입구가 서쪽을 향하였을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횡산고분은 횡산마을 북쪽에서 동남동쪽으로 내려오는 구릉의 끝부분에 있다.(이준호씨집 뒤쪽)

    •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 산63-10외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19호
    • 소유자 : 국유
    • 규모 : 3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