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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리(佳雲里)

    총 면적은 175만평쯤으로 신광리에 이어 다시면에서 두 번째로 넓은 면적의 리이다. 임야가 130만평이고, 경지는 논 13만평, 밭 9만평정도 된다. 신걸산(368m) 정상에서 내려선 남서쪽 기슭에는 복암사란 사찰이 있고 남쪽 영산강 변에는 구진포가 있다. 구진포는 영산강이 감도는 곳으로 공격사면에 해당해 소(沼 Pool)가 형성돼 옛날 갯물이 올라올 때 장어가 많이 잡혀 구진포장어로 전국에 소문이 난 곳이다. 지금도 신흥식당을 비롯 10여집이 옛 명성을 따라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가운리는, 1구 운암(雲岩), 2구 가동(佳洞), 3구 신걸(信傑)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리 1구 운암(雲岩)마을, 마을형성은 어느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입구에 있는 입석과 지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긴 세월을 두고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됨. 지명유래는 마을 뒤편에 구름바위가 있다해서 한자로 표기하면서 운암(雲岩)이 되었으나 본디 삽초골, 삽작골, 출동(朮洞)으로 불러 왔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마을 어귀 길옆에 서있는 높이 170cm쯤 되는 선돌과 조남재(수성 최씨 최순의 재실), 청모재(광산 김씨 김필연의 재각), 마을회관, 동각 등이 있다. 총 43가구에 77명(남 33, 여 44)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가운리 2구 가동(佳洞)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마을앞에 지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형성이 고대국가 시대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측됨. 지명유래는 백제시대 중들의 옷을 만들어내는 가내공업이 있어 일명 가삿골이라 하였으며 당시 서민들이 입을 수 없는 아름다운 천으로 만들었다 하여 가동이라 함, 마을에서는 복암사 어귀에 있어 절에서 입는 가사(袈裟)를 만든 곳이라 가삿골이라 했는데 축약하면서 아름다울 가(佳)를 쓴 듯하다. 가장자리에 있다는 뜻으로 가상골이라 부른 것이 가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 남쪽 광목간 도로 북쪽에 3개 군에 걸쳐 32기 분포), 복암사(서기 546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고 있는 사찰로 신걸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 내에 총 높이 2.6m 탑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측되는 3층 석탑이 있었으나 현재 2층 옥개석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다), 이 외에 여재각(추계 추씨 재각), 영모재(서흥김씨 재각), 열부제주양씨 기행비, 시랑면사무소터(가운리 408번지 일대) 등이 있다. 총 48가구에 109명(남 52, 여 5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가흥리(佳興里)

    총 면적은 73만여평에 이른다. 1970년대 신석기시대 벼꽃가루가 가흥리 앞들에서 발견된 바 일찍이 농경문화가 형성된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대박산을 중심으로 뻗어 내린 등성이에는 명혈이 맺혀 있어서인지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가흥리는, 1구 정가(正佳), 2구 신흥(新興, 龍興, 新基, 영창머리)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흥리 1구 정가(正佳)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조선시대 흥성장씨와 330년전 신안주씨가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면 당시 맨가에 위치한 마을이라 정가태(정가, 상촌이라 하던 것을 줄여 정가 촌이라 한 것으로 마을 앞의 들을 이에 따라 가상들이라 불렀다. 한자표기는 편의상 차용하여 쓴 것으로 풀이된다. 마을을 세분하면 양달(정가), 응달(안골)로 구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느티나무(1610년께 신안주씨 주사(株士)가 심은 나무로 1982년 12월 3일 나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일문사, 신안주공유애비, 선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

    ☞ 보물이 있는 풍정마을 : 면 소재지에서 정가마을에 못미처 위치해 있는데 원래 죽오당 김건이 가흥리 280번지에 소축한 풍정(楓亭)이란 정자가 있어 마을이름을 풍정이라 하였다. 풍정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그 지명만 남았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최윤하 소장 고문서(무숙공 최희량장군의 임란첩보서목으로 보물 제660호로 1972년 4월 지정, 최희량장군 교지를 비롯 다수의 고문서가 있다), 최을휴 소장 고문서(1894년 나주목사 민종열이 발급한 수다면향약소장천정기), 최희량장군생가터(가흥리 270번지 최윤하 집 뒤 대밭에 있다) 등이 있다. 총 59가구에 123명(남 59, 여 64)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가흥리 2구 신흥(新興)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미상이나 대체로 조선시대초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됨. 지명유래는 원래 신기, 용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용흥(龍興)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신기 마을의 신(新)자를 다시 취하고 용흥 마을의 흥(興)자를 각기 취하여 신흥마을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대박산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데 용이 일어나는 형국이라 마을이름을 용흥(龍興)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무숙사(가흥리 453-2번지에 있으며 무숙공 최희량(1560~1652)장군을 모신 사우이다. 1984년 5월 국비 1억5천만원으로 건립했다), 최희량장순신도비(지방기념물 제53호로 가흥리 369번지에 있으며 1901년 8월에 건립하였다), 충일사터, 삼선생 유허비(이순신, 최희량, 정여린 삼인에 대한 기록이 있음), 삼주정터, 비은정터, 여견재, 신석기시대유적, 이계근소장고문서, 대박재, 모재흥성장공효행비, 연자방아(돌로 만든 방아) 등이 있다. 총 31가구에 69명(남 28, 여 4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곡리(東谷里)

    총 면적은 83만여평에 이르며, 해발 30~50m쯤인 구릉지에 기대고 양지바른 남동향을 취하면서 동네가 자리하고 있다. 가장 서쪽에 있는 동촌은 옷갓등(33m) 자락에 등을 대고 동쪽 대양뫼에서 나온 새양골과 가식골 남쪽 황새골에서 나온 물이 적신 들을 남쪽에 두고 있다. 동곡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오랜 옛날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있었으나 그 년대는 미상이고 1595년 수성최씨 십삼대때부터 거주하여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원래 수다의 본촌 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동촌 마을이라 하였다. 당삿굴은 동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고, 샘모실은 당삿굴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신기(새터)라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지석[고인돌](돌곡재에 12기가 있다[돌칼, 돌도끼가 마을 뒷산 옥갓 등에서 출토되었다]), 최택현선생순국유덕비(학교면 석정에서 일본 헌병과 싸우다 48세에 순절한 최택현(1862~1907)을 기린 빗돌), 효열부유인수성최씨효열비, 경사재(함평이씨 참의공 이현의 재각), 동산재(흥성장씨 참봉공의 재각), 사당(1700년에 지은 수성최씨 종가집 사당), 이계학소장고문서, 최병학소장고문서와 연자방아, 마을창고, 회관 등이 있다. 총 51가구에 118명(남 59, 여 59)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곡리 2구 대곡(大谷)마을, 마을형성은 고려시대때부터 김씨, 정씨, 이씨가 살았으며 그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물한실이라 부르며 큰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한실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물안실은 수다촌(水多村)으로, 물안실은 물한실로 변하고 다시 한실, 대곡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비자나무(마을 동각 옆에 있으며, 수령은 500~700년으로 본다), 선돌(立石 - 마을 앞에 배맨돌이 있고 마을안에 3기가 있다. 동각 옆에 있는 것은 높이 94cm쯤 되고 선독거리 느티나무 옆에 있는 것은 높이 70cm, 폭 40cm쯤 된다. 정복림 배밭에도 1기가 있다), 연자방아, 정자, 마을회관 등이 있다.
    ☞ 회산(橫山)마을, 원래 비들메라 부른다. 이는 둘러진 산기슭에 위치함에 붙여진 이름으로 비들메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횡산으로 표기하다 오늘에 이르렀다. 주민들은 고려시대에 횡산소(橫山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동곡리 고분군(문화재자료 제219호)이 동곡리 210번지 이준호 집 뒤 조산에 있다 총 76가구에 176명(남 94, 여 82)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곡리 3구 월곡(月谷)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중기 밀양박씨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달 모양 비슷하다하여 월곡이라 칭(稱)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대림개발(옛 박금서 땅이던 점등 27번지 일대 2만여평에 10만주가 넘는 오엽송이 20년전에 나주 금천에서 온 김옥수에 의해 가꾸어져 있다), 현재는 없어진 기와 점터,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51가구에 130명(남 63, 여 6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곡리 4구 시계(市溪)마을, 마을형성은 원래 월곡마을이였으나 1952년에 신용마을에 있던 시장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주위로 점차 주택이 들어서게 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원래 월곡마을 일부로 저습지, 일부는 하천부지, 일부는 철도부지인 밭이었던 곳을 1952년 신용마을에 있던 장터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시장 주변으로 점차 들어서게 되어 1970년 월곡마을에서 분리되어 마을앞에 하천이 시냇물이 흐른다하여 마을이름을 시계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정부도정공장, 양곡창고 6동, 다시면 5일시장 등이 있다.
    총 69가구에 191명(남 91, 여 100)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곡리 5구 월성(月星)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경에 이 마을에 3호가 거주하며 지내다 그 후 1955년경에 서상식을 비롯하여 다수가 과수원을 경작코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원래 반달고장이라 했다. 마을에서는 마을이 형성되기 전에는 월영동(月影洞)이라 하였는데 마을이 형성되면서 마을 이름이 달그늘에서 살아야 되겠느냐 마을명을 바꾸자 하여 월성으로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월성배작목반저온저장고,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4가구에 112명(남 63, 여 49)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당리(東堂里)

    총 면적은 94만여평이며, 청림산의 남동쪽에 있는 무제봉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내려있으며, 서쪽으로 고막원천을 건너면 함평군 학교면 석정리, 남쪽은 영산강 건너 공산면 백사, 신곡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동당리는, 1구 두만(斗滿), 2구 동백(東栢, 堂村), 3구 청림(靑林化丁)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동당리 1구 두만(斗滿)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정씨들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그 후 팀진최씨가 마을에 이주하면서 주축을 이루고 있음.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이 남쪽으로 내밀려 감싸 두머니라 칭했으나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두만이라고 했다. 마을에서는 월서(月西, 당산메)마을과 두만(豆滿)마을을 합하여 두만마을의 만자와 월서 마을의 월자를 각각 취하여 만월(滿月)이라고도 부른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산7번지에 23여기가 산재해 있다), 사당(祠堂 - 1770년 최수인이 동당리 113번지에 건립한 최진명 사당이다), 삼청당(탐진최씨 진한의 재각), 영사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관경재(탐진최씨 최진명의 재각), 두호재(최진명이 후학을 가르친 서당(1965년 훼철되었다), 선돌, 최영오 소장 고문서,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38가구에 100명(남 55, 여 45)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당리 2구 栢村(冬栢, 堂村)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 하동정씨가 자리를 잡고 살다가 그 후 탐진최씨가 살았으며, 이조말엽에 함평이씨가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금성산의 서쪽 이십 여리 청림산 구릉지에 500여 년 전 河東鄭氏(하동정씨)가 터를 잡아 동백나무가 많다하여 冬栢(동백)이라 하고, 마을 뒷산에 세금을 바치던 堂(당)이 있었다하여 堂村(당촌)이라 하였으나 두 마을을 합하여 栢村(백촌)마을이라 한다. 이조말엽 耽津崔氏(탐진최씨)도 거주하였으나 서기 1650년경부터 함평이씨 임란공신 병조참판 이광선장군 후손들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自作一村(자작일촌)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은 고인돌(마을앞 함정고개에 20여기), 영산강과 고막강이 합류되는 石官汀(석관정)나루터 江上(강상)절벽위에 자리한 石官亭(석관정, 함평이씨 현감공 盡忠(진충)의 정자), 마을입구에 우람하게 서 있는 壬亂功臣 兵曹參判 李光先將軍 忠義碑(임란공신 병조참판 이광선장군 충의비, 이광선장군의 이치, 행주대첩의 행적), 영사재(이광선장군 재실), 문촌공회관(이광선장군 후손들의 집회장), 堡烈閣(함평이씨 大憲(대헌)의 처 나주나씨), 마을회관이 있고, 후손들이 중히 여기던 이광선장군의 1599년도 교지 및 1605년 선무원종공신녹권은 문화재급으로 현재는 광주박물관에 기탁 관리 전시하고 있으며 이승범 소장 고문서(죽포면 세금수납 장부)가 있고 마을내 동촌제가 현존하고 있다.총 42가구에 87명(남 43, 여 44)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동당리 3구 청림(靑林化丁)마을, 지명유래는 영산강 유로가 굽이 돌기에 꽃쟁이(化丁)이라 했다가 마을 주위에 나무가 많고 숲속에 마을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많다하여 청림(靑林)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샛골나이(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면나무(팽나무로 수령 250년, 수고 16m, 둘레 3.0m로 1982년 12월 3일에 지정되었다), 모인재(탐진최씨 사촌 최사물의 재각), 고인돌,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21가구에 49명(남 26, 여 23)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문동리(文洞里)

    총 면적은 120만여평이며, 동쪽편에 반계, 장내, 송촌마을이 있고, 서쪽편에는 학정, 증문이가 있다. 남쪽편에 증문마을이 위치해 있다.
    문동리는, 1구 반계(磻溪),장내촌(墻內), 2구 송촌(松村),학정(鶴亭), 3구 증문(曾文)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문동리 1구 반계(磻溪)마을, 마을형성은 함평이씨가 1650년경에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기냇가의 돌이 반석으로 형성되어 있으므로 마을이름을 반계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백제시대에는 탑불래(塔佛萊)라 불렀다고 하는데 이선즙(李先楫)의 호가 반계이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반계라고 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문동리 316번지 이계석의 집 뒤 20m 지점에 3기가 있다), 석탑(문동리 318번지 이창헌의 집 화단에 위치하고 있다.), 율수재(함평이씨 만호공파 종회각과 만오공 이종지의 재실), 영사재(탐진최씨 학령의 재실),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장내촌(墻內)은, 샛골장 안쪽에 있는 마을이 되므로 장안마을이라 한 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장내촌이라 한 것이다. 마을에서는 담안장자를 써서 장내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유허비(고성이씨 이절의 빗돌로 1979년에 세웠다. 이절(1411~1462)은 1426년 문과에 급제해 1450년 전라감사를 엮임했다), 적산재(고성이씨 감사공 절의 재각), 농와고성이공동련추모비, 동각 등이 있다. 총 33가구에 68명(남 32, 여 36)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문동리 2구 송촌(松村)마을, 마을형성은 흥성장씨 장극평이 남원에서 출생하여 1460년경에 이곳에 들어와 함평이씨 이극명의 손과 결혼하여 정착하였음. 지명유래는 원래 고장촌(古庄村)이라 하였는데 샛굴이 초동으로 바뀔 무렵에 마을 뒷산이 비옥하고 소나무가 무성하며 산세가 좋아 송촌이라 개칭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송촌사(1927년 문동리 101번지에 건립되었다), 야우정, 모의정, 영사재, 죽영재, 묵재함평이씨정규유허비 등이 있다.
    ☞ 학정(鶴亭)마을, 골짜기에 길게 뻗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장동이었다가 마을형국이 학머리 같다해서 학등, 학정이 되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지석묘(학정마을 입구 함평이씨 문중산이 있고 이곳은 길과 접해 있는데 여기에 확실치는 않지만 동서 2열을 이루면서 24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한다), 고분(마을 어귀 52번지에 있는 조산, 학의 먹이인 우렁으로 비유한다), 추감재(1925년에 건립한 서산감씨 참의공 김세탁의 재각) 등이 있다.
    총 35가구에 86명(남 45, 여 4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문동리 3구 증문(曾文)마을, 마을형성은 함평이씨가 1470년경에 함평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들어와 정착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옛날 유명한 학자가 이 마을에서 살다가 떠났다하여 증문이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을 세분하면 큰증문, 작은증문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다시남초등학교[폐교]뒷 편에 13기가 있다), 초동사(1960년에 문동리 803번지에 건립한 함평이씨 중시조 8위(位)의 사당), 성균진사석호이익빈효행비, 파주염씨열녀문, 수덕재(함평이씨 초동사의 강당), 백이재(함평이씨 이몽사의 재각), 귀후재(함평이씨 통훈장공 서란의 재각), 영춘재(함평이씨 병절교위공 기의 재각) 등이 있다.
    총 47가구에 118명(남 65, 여 53)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복암리(伏岩里)

    총 면적은 144만여평이며, 회진성터의 주봉인 거마산(159m) 서쪽 능선에 있는 해발 170m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친 멧발 서편에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배산인 거마산 자락을 풍수지리상 말 형국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복암리는, 1구 중동(中洞), 2구, 랑동(郞洞), 3구 강암(江岩)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복암리 1구 중동(中洞)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경에 파평윤씨 윤덕병씨가 영산강변에 버려진 땅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974년에 수해 상습지구로 인하여 현재 마을로 집단 이주하였음. 지명유래는 원래 다시들 한복판 들 가운데 있다 해서 중몰이라 부른 것이 한자화 해 중동이라 표기했다. 영산강의 잦은 범람으로 자꾸 흙과 모래가 쌓여 높드리 땅이 마련되고 일제에 의해 양수시설과 인공제방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위치로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 남동편 김봉철씨 밭에 19기),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6가구에 109명(남 50, 여 59)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복암리 2구 랑동(郞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려 말엽 시량이라는 벼슬을 가진 양금성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골씨도 함께 정착하였으나 고려가 망하자 양씨 골씨가 마을을 떠나고 나주임씨가 정착하였다. 지명유래는 원래 시랑골이라고 했다. 고려때 양동재와 김탁이 시랑(侍郞)을 맡은 뒤, 공민왕이 시해되고 정국이 혼탁하자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시랑골이라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복암리고분군(사적 404호), 고인돌(시랑골에서 가운리 가동으로 넘어가는 뚜개비재 남쪽 계곡을 따라 거의 일렬로 7기, 고개마루에 4기, 낭동저수지 안에 3기), 1974년 7월 시랑골 고인돌군 옆에서 유구석부가 표면채집된 바 있는데 길이 10.1cm, 최대폭 3.8m, 두께 3.3m의 소형 응회암으로 만들어 졌다, 임필상선덕비, 숭유재(제주양씨 재실), 임병원고가, 임병억고가, 임하규고가, 임종학고가, 느티나무(27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39가구에 98명(남 50, 여 48)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복암리 3구 강암(江岩)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초기부터 마을에 탐진최씨가 살았으며, 1750년경에 나주임씨가 광산군 삼도면에서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마을 주변에 바위가 많고 마을 앞으로 강이 흐른다해서 강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복암리 783번지 이승우씨집 문벽에 있는 둘래 20m, 높이 3.6m 쯤 되는 거대한 고인돌이 있어 넓을 광(廣)자를 써서 광암(廣岩)이라고도 하고 이 고인돌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해서 내릴강(降)자를 써 강암(降岩)으로도 불려진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이승우집 담벽에 있는 둘레 770cm × 210cm, 높이 360cm쯤 되는 큰 바위로 강암바위라 부른다), 근촌이상술선생기적비(1995년 4월 20일 완재시조창 기능부유자로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된 근촌(謹村)이상술(李相?)선생 빗돌로 1996년 5월 19일에 기념식을 마을에서 가졌다), 효열각, 효열부나주오씨기행비, 나주대학(복암리 산 1-1번지 김용섭씨 배 과수원 주위에 건립), 동각,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75가구에 177명(남 82, 여 95)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송촌리(松村里)

    총 면적은 164만여평이며, 서쪽은 고막원천 건너 함평 함교면 고막리, 북쪽은 문평면 옥당·산호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송촌리는 동쪽 가삿골, 새앙골, 대양뫼골, 여개이골 등에서 나온 물이 북서쪽으로 흘러 송정저수지에 모아졌다가 본촌앞들을 적시며 고막들로 흐른다. 고막원천과 만나는 곳은 유로변동이 심해 물방죽, 새방죽과 같은 습지가 생겼으나 경지정리시 개답되었다.
    송촌리는, 1구 본촌(本村), 2구 호장(虎長), 3구 송정(松亭)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송촌리 1구 본촌(本村)마을, 마을형성은 1550년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수다면의 중심마을이므로 본촌이라 하였다. 마을에서는 송촌리중 가장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본촌이라 했다고 전한다. 마을을 세분하면 큰동네, 밀양동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 앞 김순열 논에 7기, 마을에서 건너다 보이는 곳에 김해김씨 숭모재가 있는데 이 입구 주변에 11기가 있고, 여기서 남쪽으로 100m 떨어진 김해김씨 선산에 석실이 노출되어 있는 고인돌 1기가 있다. 또 이 사이에 1기가 더 있다), 김해김공명규공적비(1990년 마을 앞에 건립하였는데, 1977년에 시작하여 1978년까지 경지정리를 실시하던중 경지정리 사업에 불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피습 당하였다. 주민들이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것이다), 학알(死鶴), 영모재(함평이씨 장이경의 재각), 숭모재(김해김씨 시중공 숭복의 재각), 해주오씨 송은 오몽근 효행실적비, 절터(밀양사터라고도 부른다), 김남순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겸 노인정 등이 있다.
    총 43가구에 114명(남 61, 여 53)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송촌리 2구 호장(虎長)마을, 마을형성은 1760년경에 은진송씨가 충청도 은진군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정착하면서 점차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옛날 목포에서 한양가는 통로인 지금의 함평과 나주의 경계에 어름재가 있었고, 그곳에 무서운 호랑이들이 서식하여 젊은 장정들도 호랑이가 무서워 넘지 못하고 여러명이 함께 모여서 넘었다하여 호장이라 한다. 마을에서는 호산을 중심으로 호장마을이 호랑이의 입에 해당되므로 호장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뒤 작은범산에는 둘레가 15m나 되는 큰 고인돌 2기가 한양을 드나드는 나그네들의 발자취를 우뚝서 내려다 보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온 마을 앞 동각은 호남선 철도와 국도1호선인 광목간(광주-목포)도로가 발 뿌리에 접해 있어 上下村(호장, 용호) 주민들의 만남의 장이요 애환의 터전이었는데 2001년 8월 지나온 역사를 모두 감추고 이제는 회관과 나란히 새로 신축하여 폐지된 선로와 국도만을 바라보며 지난날의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
    총 43가구에 102명(남 50, 여 52)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송촌리 3구 송정(松亭)마을, 마을형성은 300년전에 전씨 최씨가 거주하면서 빙개라 하였으며 250년전부터 인동장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처음에 빙개라 불렀는데 후에 마을앞에 큰 노송이 있고 그 주위에 집을 짓고 정자를 두었는데 여기에서 이름을 취하여 송정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송정 고인돌은 가, 나, 다군의 3개군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모두 14기가 있다), 선돌(배매는 돌, 물레독이라고도 한다), 영사재, 추원재, 문강공신도비,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인동장공유허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4가구에 94명(남 43, 여 5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신광리(新光里)

    총 면적은 265만여평으로 다시면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 임야가 224만평인데 반해 경지는 28만평쯤 된다. 신골 밑에 만든 신광저수지 물이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고 독배개를 거쳐 남서쪽으로 내린 신광천은 보광골을 적신다. 이 근처의 산록완사면상에 형성된 밭에서 나는 무는 나주 팔진미의 하나로 여겨져 임금님께 진상되기도 했다. 솟대를 지나 보광사가 있었던 젖골 동편 따박굴 아래는 신촌이 있고 바로 남쪽 외앗골에는 오동마을이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오동 남쪽에는 옛 신광국민학교가 있었던 홍동뜸이 있고 바로 남쪽에는 새마을촌과 문암마을이 있다. 신광리는, 1구 보광(普光),덕산(德山), 2구 신기(新基),오동(梧洞)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신광리 1구 보광(普光)마을, 마을형성은 350년전에 양씨와 고씨가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보광면으로서 소재지였으며 문평면에서 1983년도에 다시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음. 지명유래는 원래 보광사가 절골에 있어 보광마을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을 세분하면 양달, 응달마을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마을입구 김두경 밭에 남북일렬로 고인돌 13기), 선돌(마을어귀 박시양 논 귀퉁이에 높이 150cm의 선돌), 금양재, 금서재, 은행나무(수령 5~600년, 할머니 나무), 귀목나무(수령 400년, 할아버지 나무), 마을회관 등이 있다. ☞ 덕산(德山)마을, 원래 무더미라 했는데, 임란 이전에 마을이 있었으나 임란을 겪으면서 마을이 폐촌되었다고 한다. 일제때는 문향리(文鄕里, 문행이)라 불렀으며 해방 후 백운마을과 덕산마을을 합하여 편의상 덕운이라고 하여 한 마을로 하였다가 1952년경 다시 분리되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금사정충의이공신도비(전주이씨 중희의 빗돌로 1919년에 건립), 금사정(달성배씨 재실로 1949년 4월에 건립, 배형윤이 배향되어 있는 곳이다), 전주이씨 재실, 김해김씨 재실, 동각 등이 있다.
    총 47가구에 117명(남 55, 여 62)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신광리 2구 신기(新基)마을, 마을형성은 450년전에 15호 정도가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나주군 용문면에서 문평면으로, 다시 1983년에 다시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음. 지명유래는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새터라 부르다가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기촌이라 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기와점터, 보광사지, 당산나무(시보호수 - 500년), 광명재, 동각 등이 있다. ☞ 오동(梧洞)마을, 원래 오얏굴이라 부르던 곳으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오동이라 했다. 오동나무가 많이 있던 곳이라 이렇게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14기), 신광분교터(폐교), 동각 등이 있다.
    ☞ 새마을촌(구암촌)은, 새마을촌은 1979년 설촌되었으며, 1830년 함양박씨 박치옥이 영암 구림에서 구암촌으로 입향하면서 형성되어 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새마을촌 마을 북쪽 길가로 3기의 고인돌이 있다. 장축방향은 동서이다. ☞ 문바위의 정기가 서린 문암마을이 아래로 형성되어 있다.총 60가구에 135명(남 69, 여 66)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신석리(新石里)

    총 면적은 20만여평이며, 마을 앞으로는 문평천이 감아 돌아 흘러 터진목 나루에서 영산강에 합류한다. 감조하천인 시절에는 바닷물이 밀고 올라와 수운이 용이해서 조선조때 나주의 서창(西倉)이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신석리는 1구 석봉(石峯), 2구 동산(東山)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신석리 1구 석봉(石峯)마을, 마을형성은 1510년경에 나주정씨인 정중진이 노안면 기만리에서 이곳으로 들어와서 점차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마을 뒷산봉우리가 아담하게 새개가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른다 하여 삼봉이라 했다. 자연마을, 후석, 삼봉, 서창으로 나뉜다. ☞ 후석(朽石)은, 서근들이라 부르다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썩은들로 보아 후석이라 칭,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지석묘 3기, 창주정, 전동림소장고문서, 정우선소장고문서, 동각 등이 있다. ☞ 삼봉(三峰)은, 산봉우리가 3개인 대박산 남동쪽 봉우리 2개 산아래에 위치하므로 마을 이름을 삼봉이라 한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선돌(높이 140cm, 둘레 70cm), 공동샘(1954년부터 사용),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서창(鶴洞)은, 나주목의 서창이 있어서 연유했고, 풍수지리상 마을이 학처럼 생겼다하여 서창마을 대신 학동이라고도 부른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서창(西倉)터, 선돌(2m×40cm), 당산나무, 동각 등이 있다.
    총 67가구에 172명(남 85, 여 8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신석리 2구 동산(東山)마을, 마을형성은 경주김씨가 1,500년경에 본 마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마을의 방향이 동쪽을 향하고 마을 뒤로 산이 둘러있어 마을이름을 동산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돈목재(증병조판서 함평이씨 이극명의 재각), 영목재(절도공 종인의 재각), 금호 박인천 선생 공덕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31가구에 69명(남 28, 여 4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영동리(永洞里)

    총 면적은 67만여평으로 다시면의 소재지 통에 있는 중심리로 문평천이 만든 해발 10~15m 퇴적토 위에 들어섰다. 문평천을 중심으로 중앙마을, 신용, 흑암마을은 동편에 있는데 평야지로 높은 산이나 구릉이 없고, 영동, 초동마을은 문평천의 서편에 있는데 두 마을은 뒷편으로 얕으막한 산등을 두고 자리하고 있다.영동리는, 1구 신용(申用?新龍),중앙(中央), 2구 흑암(黑岩), 3구 초동(草洞),영촌(永村)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영동리 1구 신용(申用·新龍)마을, 마을형성은 1850년 李浩吉(이호길)이 가흥리 용흥마을에서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는 의미로 처음에 새신(新)자와 용흥(龍興)의 용(龍)자를 각각 취하여 신용(新龍)으로 했는데 후일 한자 표기가 간략화 되면서 신용으로 되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신협, 다시새마을금고, 다시중학교, 농협창고, 최병철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중앙(中央)마을, 마을형성은 1910년 千基成(천기성)이 다시면 죽지마을에서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점차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신용마을의 일부로 1920년경에는 5호가 거주, 1930년께 백룡제 축조와 다시역이 개통되면서 점차 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1953년경 다시면사무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다시면의 중심이 되므로 중앙동으로 이름을 정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구)다시면사무소, 다시역, 나도금공적비, 나주배꽃정보화센터 등이 있다.총 100가구에 304명(남 144, 여 160)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영동리 2구 흑암(黑岩)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 李泰運(이태운)이 문동리 반계마을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거주하면서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으며, 지명유래는 마을 입구에 커다란 검은바위(고인돌) 3개가 있으므로 흑암마을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3기, 당산나무 약 180년, 흑암정(동각) 등이 있다.총 32가구에 89명(남 48, 여 4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영동리 3구 초동(草洞)마을, 마을형성은 고대국가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며 행주기씨가 거주하였고, 함평이씨가 이 마을에 들어온 것은 1450년경에 李克明(이극명)이 시량에서 살다 이곳으로 왔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예전에는 샛골이라 부렀는데 이는 사잇골이란 뜻이다. 즉 산 구릉과 구릉사이에 있는 사잇골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하면서 사이는 새로 축약되고 새는 곧 풀을 의미하여 풀초(草)자를 써서 초동이라 한 것이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수다면사무소터, 포충각, 남파정, 금사정, 남사정, 왕자사부죽오당김선생 유허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영촌(永村)마을, 마을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 지명유래는 역촌(가마꾼 마을)이었던 것이 영촌으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보산정사(전남문화재 제131호), 보산사, 무열사(지방기념물 제57호), 현충각 등이 있다. 총 68가구에 161명(남 77, 여 84)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운봉리(雲峰里)

    총 면적은 121만여평으로 백룡저수지가 있는 곳이다. 동쪽 신걸 자락에는 백운(사그실), 서쪽 백룡에는 백동, 칠봉, 회두마을이 모두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운봉리는, 1구 백동(白洞),백운(白雲), 2구 칠봉(七奉),회두(回斗)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운봉리 1구 백동(白洞)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중기에 전주이씨가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영개면에 소속되었다. 1900년대에는 문평면으로 1983년에 다시면으로 편입됨. 지명유래는 백룡산 아래에 위치하므로 백룡 또는 백룡산으로 불리우다가 백산 또는 백동으로 축약되어 부르게 되었다. 마을을 세분하면 소재동 웃뜸, 용사촌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소재사터, 정식장군 묘, 영모재, 원모재, 백산재, 열부이천서씨 실적비, 효열부 전주이씨 실적비, 효열기적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 백운(白雲)마을, 원래 사기를 굽던 곳으로 사기실이라 했다가 백룡저수지가 만들어지고 백운이라 칭했다. 마을내 주요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38기(백운마을 입구 4기, 백룡저수지 안 16기, 마을 서쪽 논에 18기), 입석 2개(동각옆에 높이 134m, 마을 어귀 길가에 높이 160m), 사기도요지, 노거수숲, 영모재, 저존재 등이 있다. 총 59가구에 131명(남 68, 여 63)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운봉리 2구 칠봉(七峰)마을, 마을형성은 조선말엽에 함평이씨가 문평면 상하 마을에 살다가 이 마을로 이사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누에머리 등성이로부터 칠두정까지 일곱봉우리의 능선에 터를 잡아서 칠봉이라 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이기태 집터(현재 오석기 집)에 고성이씨 사당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어졌다.
    ☞ 회두(回斗)마을, 마을 형국이 호랑이 머리모양과 같다해서 호두(虎頭)라 하다가 회두로 변했다. 칠두정이 있는 작은 마을은 칠두라 부른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칠두정, 열부함평노씨 기행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31가구에 88명(남 37, 여 5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월태리(月台里)

    총 면적은 74만여평으로 북쪽에 백룡산의 우람함을 바탕으로 문평천의 들판 높드리땅에 자리잡고 있다. 다시면의 중앙에 해당된 위치로 광목간 신작로와 철도가 있어 더불어 발전하다가 1970년대 국도 1호선이 확장되면서 정류장이 북쪽(현 위치)으로 이동한 뒤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월태리는, 1구 대용(大用)?쌍암(雙岩), 2구 월명(月明), 3구 원동(元洞), 4구 월천(月川), 5구 영룡(永龍)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월태리 1구 대용(大用)마을, 마을형성은 1820년경에 밀양박씨가 5호 정도 살았으나, 1932년에 백용저수지가 생긴 후 점차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마을에 숲이 우거져 있는 숲안으로 불리웠고 표기상 수반(樹半)이라 했다고 한다. 또 백룡산 아래에 위치하고 다시면에 속했기 때문에 다룡촌(多龍村)이라 부른 뒤 1935년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대용(大用)이라 하기도 했고, 대룡촌(大龍村)이라 부르기도 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다시면사무소, 다시파출소, 다시우체국, 다시초등학교, 다시복지회관, 다시노인당, 예비군다시중대, 농민상담소, 다시농협, 다시천주교회, 이민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쌍암촌(雙岩)마을, 마을 뒷편 박남박씨 세장산 빗돌 있는 곳에 고인돌이 있어서 이름했다 한다. 여러개의 뜸이 있었는데 유황, 대반, 청평, 류죽으로 구분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 김기홍소장 고문서 등이 있다.
    총 182가구에 522명(남 261, 여 26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월태리 2구 월명(月明)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함평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침 마을 뒷편에 떠오르는 달이 유난히 밝아 이곳을 월명이라 칭하고 마을이름을 월명실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17기(이대호 포도밭 7기, 이양교 포도밭 6기, 기타 1기), 선돌(마을 앞에 높이 2m, 둘레 70cm), 석불좌상, 망사재,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60가구에 155명(남 70, 여 85)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월태리 3구 원동(元洞)마을, 마을형성은 이조시대 전의이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됨. 지명유래는 삼국통일시 신라에 원병왔던 당나라 대군이 물러가면서 복암사를 불지르고 횡포하여 동리앞에다 인마의 수급을 묻자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백제의 백성들이 인마의 수급을 발굴하여 제를 지내고 원한을 달래어 줬다하여 怨洞(원동)이라 불리어 오다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좌측 전의이씨 세장산에 있음), 신사터, 지금은 없어진 개계원터,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5가구에 98명(남 48, 여 50)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월태리 4구 월천(月川)마을, 마을형성은 1935년에 고성이씨 이기권이 초동마을에서 살다가 이곳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함, 지명유래는 마을 앞으로 냇가가 굽어 흐르는데 그 냇가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돌은내라 부른 것이 달내가 되고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천이라 한 것이다. 냇물이 달에 비친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 전하기도 하며 마을 형태가 반달 같다하여 월천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현대의원,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118가구에 303명(남 147, 여 156)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월태리 5구 영룡(永龍)마을, 마을형성은 나주나씨 나천기가 1560년경에 나주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와서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처음에는 영하촌이라 하였고, 그 후 용계(龍溪)마을 영안(永安)마을이라 하였으며, 일제시대에 영계, 광복후에는 다시 영룡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고인돌 6기(마을 입구 구릉상), 옹관묘(나주나씨 문산에 4기가 있음), 나상철 소장 고문서,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46가구에 93명(남 52, 여 41)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죽산리(竹山里)

    총 면적은 140여만평으로 다시면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리로 영산강을 경계로 왕곡, 공산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풍수지리상 와우형국이었다고 저하나 금호 박인천이 거북형국이라고 하였다. 즉 거북이가 물속으로 들어가려는 형국으로 소요정이 그 머리이며, 돌캐산 다섯 봉우리가 거북의 알이다. 또 동산의 창고터가 발로 일명 사석바우라 한다.죽산리는, 1구 죽지(竹池), 2구 산두(山頭), 3구 조등(鳥嶝), 4구 절구(杵九), 5구 화동(化洞)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산리 1구 죽지(竹池)마을, 마을형성은 함평이씨 이종인이 초동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하면서 지금 이곳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자손을 낳아 마을이 점차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대못이라 부르는데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죽지라 한 것이다. 대못은 연못안에 작은 섬이 있고 그 곳에 대나무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충열각, 열녀각, 대못, 이유근유허비, 소요정, 첨모재, 류중천공로비, 이계익공로비, 백옥당, 사당 이재영 소장 고문서, 고사인이계익무본선덕비 등이 있다.
    총 41가구에 103명(남 56, 여 4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죽산리 2구 산두(山頭)마을, 마을형성은 이조말 주씨가 살았으며 금녕김씨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용이 일어난다 하여 용흥(龍興)이라 불렀는데 그 후 마을의 위치가 산머리에 위치하므로 산두라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효자삼성당김년김씨형종기행비,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22가구에 55명(남 29, 여 26)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죽산리 3구 조등(鳥嶝)마을, 마을형성은 1925년에 이해암이 영산강변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그해 보리 60섬을 해들이자 그 소문이 퍼져 농토 없는 가난한 농가들이 모여들었다함. 지명유래는 지형이 새등처럼 생겨서 마을이름을 조등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1925년경에 설촌된 마을인데 1974년 11월 영산강의 범람으로 인해 현재의 마을터로 집단 이주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인수재(함평이씨 이극해의 재실), 임종무 소장 고문서(구운몽 가곡, 일소록),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50가구에 108명(남 51, 여 5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죽산리 4구 절구(杵九)마을, 마을형성은 1650년경에 김해김씨가 이곳에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함. 지명유래는 약 300년 전에 流配(유배)온 어느 개감이 마을형태가 마치 절구통 같이 생겼다하여 절구라 칭하였다고 한다. 옛 우물터 상수도 안에 절구같이 생긴 학독이 들어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 1기(장군석이라 한다), 당산나무(귀목나무 400년),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16가구에 32명(남 15, 여 17)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죽산리 5구 화동(化洞)마을, 마을형성은 500년전에 고흥에서 아산이씨 할머니가 남편과 며느리를 잃고 이곳으로 와서 함평이씨를 다시 며느리로 들여 자손을 번성시켰음. 마을지명은 마을이 배 형국이다. 마을앞까지 배가 드나드는 죽포(竹浦), 선두촌(船頭村)이라 하였으며 그 후 일제시대에 고흥류씨 선산이 홍화동에 있다하여 화동이라 하다가 일제말기에 한자를 간략화하여 화동으로 표기하였다고 하며, 외지에서는 마을 이름을 장춘정이라고 불렀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장춘정(지방기념물 제201호, 류충정의 정각), 숭모재(고흥류씨 만호 파의배위 아산이씨의 재실(류충정의 조모)), 추원재(고흥류씨 광국공신(선계변무의공) 남호공 류은의 재각), 월계정(고흥유씨 류인명의 정각), 전선소, 고인돌(5기 - 우암춘 뒷산에 있다), 입석(3개), 느티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팽나무(수령 330년된 나무 3구루), 은행나무(수령 500년된 나무 1구루), 죽포면사무소터(죽산리 888번지에 있었다. - 최영호 소유 밭), 통정대부도호부사 장춘공유장비, 죽산양수장,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6가구에 123명(남 61, 여 62)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청정리(淸井里)

    총 면적은 155만여평으로 다시면의 최북단에 있는 리로 1980년대에는 문평면에 속하였다. 1983년 다시면으로 편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청정리는 본촌(本村)?회룡(回龍)?금동(琴洞)?인동(仁洞)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청정리 본촌(本村)마을, 마을형성은 이조 중기에 수원백씨 백한일이 한양에서 유배되어 본 마을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유래는 원래 용문면의 소재지가 있어 본촌이라 하였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선돌(높이 80cm, 둘레 110cm의 크기에 성혈이 16개가 나 있다), 용문면사무소터(청정리 131번지), 팽나무(3구루), 연자방아 등이 있다.
    ☞ 회룡(回龍)마을, 백룡산이 북쪽으로 향해 천마봉에서 돌아 남동쪽으로 내려 기슭에 자리 잡았다는 뜻도 있고, 용문천이 구불구불 돌면서 흘러 마을 앞을 흘러갔다는 설도 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선돌(높이 120cm, 둘레 60cm의 크기로 성혈이 20개 나 있다), 광산김씨 삼강정려비, 문산여양진공유적비, 영모재(수원백씨 정해공수장의 재각)등이 있다.
    ☞ 금동(琴洞)마을, 원래 옥녀탄금형이라는 풍수형국에서 기인했다 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선돌(6기), 영모재(능서구씨 시랑공파 구재회의 재실), 효사재(달성배씨 배경복의 재각) 등이 있다. ☞ 인동(仁洞)마을, 영정굴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 어떤 연유로 칭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취운정(동각), 영정재(고성이씨 시원 영은의 재실), 영정, 마을회관 등이 있다.총 53가구에 134명(남 68, 여 66)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회진리(會津里)

    총 면적은 50여만평으로 일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랑면(侍郞面), 동강리(東江里), 누저리(樓底里), 사직리(士直里), 백하리(栢下里), 풍호리(楓湖里), 신정리(新丁里)를 합해 신정과 풍호의 첫 자를 따서 신풍리라 칭하다. 1996년 3월 15일자로 회진리(會津里)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회진리는, 1구 동촌(東村),사직(社稷), 2구 백하(柏下),정촌(丁村)마을로 고성되어 있다.

    회진리 1구 동촌(東村)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豆聘縣(두빙현)이라 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는 회진현이라 하는 곳으로서 역사가 깊은 곳임. 지명유래는 회진성의 동남쪽에 해당한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동말’이라 하다가 한자화 해 동촌이라 했다. 마을은 다시 풍호, 누저, 탑골로 나뉘는데, 풍호는 영산강 가까이에 있어 생긴 이름이고, 누저는 회진성 바로 남쪽 밑이라는 뜻이거나 종가집과 부조묘가 있어서 붙인 성 싶다. 탑골은 전에 관음사 탑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고 바로 북동쪽 고개 넘어에 간음자골 마을이 있었는데 관음사(觀音寺)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영모정(지방기념물 제112호), 기오정, 귀래정임붕유허비, 백호임제선생기념비, 백호임제선생기념관 등이 있다.
    ☞ 사직(社稷)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때는 豆?縣(두금현)이라 하였고,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여 당시 양씨, 평택임씨, 신씨, 조씨 등이 거주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 중시조 감무공(임탁)이 개성에서 지금 본 마을로 들어와 현제 23대를 이어오고 있다. 지명유래는 회진현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불려지게 되었다. 295번지 대밭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하는 바 사직단터로 여겨진다. 사직단은 나라의 토신(土神)과 곡신(穀神)에 대해 임금을 대신해 고을수령이 제사를 지낸 곳으로 고을마다 중심지 근처에 있었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나주임씨 대종가, 회진성(지방기념물 제87호), 나주임씨참판공부조사당, 영회정, 매곡재, 사직제, 마을회관 등이 있다.
    총 45가구에 117명(남 58, 여 59)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회진리 2구 백하(柏下)마을, 마을형성은 백제시대 때는 豆?縣(두금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 및 고려초에는 회진현이라 하였으며, 조선초에 나주임씨가 들어와 살았음. 지명유래는 잠애산 아래에 있다는 뜻으로 지었다. 잠애산(蠶崖山)을 한자로 풀어 누에머리와 같다고 풀고 있으나 사실 회진성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즉 성(城)은 우리 토박이 말에서 ‘잣’이 된다. 따라서 잣뫼를 잠뫼로 부르다가 산을 붙일 때 잠애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잣을 한자로 다시 옮길 때 잣나무 백(柏)자로 옮기면서 백하마을로 된 성 싶다. 마을내 주요 유물 및 시설물로는 입석(높이 140cm, 폭 120cm 크기의 액막이 용), 당산나무(450년된 나주시 보호수), 임윤택소장 고문서(금강십일인계안, 죽오랑무서 등 다수), 회진국미학교(폐교), 백하정, 마을회관 등이 있다.
    ☞ 정촌(丁村)마을, 마을형성은 옆마을 백하에서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분가하면서 차차 마을이 형성되었음. 지명유래는 샘이 있는 마을 즉 샘골로 한자로 표기하면서 샘정(井)자를 써서 정촌이라 하였는데 후에 한자를 바꾸어 정촌(丁村)으로 하였다. 꼬두샘과 새샘이 매우 역사가 깊으며 수량이 풍부했다. 마을에서는 본래 새터(新丁)라 불렀는데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정촌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총 53가구에 127명(남 63, 여 64)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 12개리가 관할하는 마을의 땅이름(地名)

    ※ 1983년 2월 15일에 문평면의 청정리(淸井里), 신광리(新光里)가 다시면의 청정리, 신광리로, 문평면의 옥당리(玉堂里)일부인 영용마을이 다시면 월태리 5구로 편입되었고, ※ 1996년 6월 24일 다시면 신풍리(新楓里)가 옛 지명인 회진(會津)의 땅이름(地名)을 되찾아 회진리(會津)로 개정되어 2003년 1월 1일 현재 총 15개리에 44개마을(52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